이탈리아 관광/중부지역

[06.16(일)] 이탈리아 4일째 - 아시시(Assisi)

하니딸리아 2024. 6. 16. 16:12

[06.16(일)] 이탈리아 4일째 - 아시시(Assisi)

 

1. 일정

  • 10:00 호텔 체크아웃
  • 12:00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 렌트카 픽업
  • 13:00 피우미치노 공항 출발
  • 15:30 Domus Pacis Assisi 체크인
  • 16:00 아시시 구시가지 관광
  • 22:00 호텔 귀환 (저녁식사 포함)

한국에서 준비해온 밑반찬

숙소에서 전기밥솥으로 밥을해서 한국에서 준비해온 밑반찬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후 택시를 잡아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갔다. 

내가 예약한 포드 퓨마(19일간 54만원)보다 더 좋은 SUV 닛산 크로스오버(유럽명 : 캐시카이Qashqai)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30Km 밖에 달리지 않은 신형차이다. Rentalplus회사에서 평점 9점이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이탈리아에 와서 최고 잘한 일이다. 12인치 디스플레이의 네비게이션이 핸드폰과 연동도 되어 편리하였고,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전후방 카메라까지 장착되어서 엄청 횡재한 느낌이었다.

 

피우미치노 공항 → 아시시 Domus Pacis Assisi 이동 경로 : 213Km(2시간 예상)

 

아시시까지는 2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중간에 휴게소에서 배도 채우고 차도 연료를 채웠다.

 

Pizza e Vai라는 피자점에서 바삭바삭한 특이한 맛을 내는 피자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멋진 렌트카의 모습
주유 시스템을 몰라서 애를 먹었다. 결국은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주유를 마칠 수 있었다.

 

2. Assisi 숙박 정보

Domus Pacis Assisi : ₩139,508(€91; €85+ €6) ★

  • 더블룸(20m²)+싱글룸(15m²), 전용욕실, 조식포함, 료주차, 평가 8.4
  • 주소: Piazza Porziuncola 1, Santa Maria degli Angeli, 06081 아시시, 이탈리아 (중심부에서 3.2km)
  • 예약정보 : 객실 2개
    - 예약번호 : 4735229132, PIN 코드:1147
    - 숙박기간 : 24.6.16(일) 체크인 시간: 18:00 - 19:00 통  - 24.6.17(월), 07:00 ~ 10:00 (1박)
    - 총 요금: 예상 요금₩131,612(€ 89.10, ₩119,647+ ₩11,965)
    - 도시세 : €2x3명 = €6
    - 차량 1대 셀프 주차 가능

 

 


3. Assisi 관광정보


아시시는 이탈리아 여느 소도시와는 조금 다른 색을 지니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평온함과 경건함의 기운이 감싸는 듯 느껴진다. 이곳은 성 프란체스코 성인과 성녀 키아라의 고향으 로 전 세계 가톨릭 신도들의 성지로 사랑받고 있다. 매년 수많은 순례 여행객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마을 안에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남아 있다. 이곳을 둘러보는 것이 아시시 여행의 핵심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도가 아닐 경우에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을 종교적 인 이유로 지나친다면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종교에 상관없이 아시시는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미사를 마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과 함께 마을의 작은 골목들을 걷다 보면 이곳이 주는 특별한 감동 에 흠액 젖는다. 또 아름다운 성당과 탁 트인 움브리아의 아름다운 평원을 조망할 수 있다.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아시시다.

아시시 여행 정보 http://www.visit-assisi.it

 

관광 안내소

  • 위치 : 코무네 광장
  • 월~토 08:00-14:00, 일·공휴일 10:00~13:00, 14:00-17:00 전화: +39 075 812534
  • 주소: Piazza del Comune 06081 ASSISI

ZTL

  • 아시시 성벽 안은 모두 ZTL 구역으로 지정 되어 있다. 성벽 밖 주차장을 이용하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방문하기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페루자Perugia에서 가깝고 오르비에토Orvieto와도 멀지 않다.

주요 도시별 최단 경로와 이동시간은 다음과 같다.

  • 로마 다빈치 공항 → 아시시 : 거리 212Km, 소요시간 2시간 30분~2시간 50분
  • 페루자 → 아시시 : 거리 25km 도로 SR316,  소요시간 30분
  • 오르비에토  → 아시시 : 거리 90km 도로 SS448, 소요시간 1시간 20분~2시간

Miroborille의 '이삭줍는 척하는 여인'

주차장

아시시를 여행할 때는 총 3개의 주차장을 알아두고 가는 것이 좋다. 첫 번째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가까운 피에트로 문Porta San Pietro 앞 주차장, 두 번째는 아시시 관광의 기점인 마테오티 굉장Piazza Matteotti의 주차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산타 마리아 안젤리 성당 옆에 있는 주차장이다.

  • 파르케지오 산타 마리아 안젤리 성당 Parcheggio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무료 야외주차장이지만 게이트가 있다. 성당 앞쪽이라 안전하다.
    ■ 야외 공용주차장 ■ 06:00~23:30 ■ 무료 06081
    ■ Santa Maria degli Angeli PG, 이탈리아 ■ 43.056315, 12.578712
  • 파르케지오 사바 마테오티 Parcheggio Saba Matteotti
    ■ 지하, 야외 주차장 겸용 ■ 24시간 ■ 1시간 1.5€, 종일 19€
    ■ Viale Giacomo Matteotti, 06083 Assisi PG, 이탈리아, ■ 43.070144, 12.618988

  • 아시시 파르케지오 사바 Assisi Parcheggio Saba
    ■ 지하 주자창 ■ 24시간 ■ 1시간 1.5€, 종일 19€
    ■ Viale Guglielmo Marconi Piazza Giovanni Paolo II,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 43.072632, 12.606704

왼쪽부터 Assisi Parcheggio Saba, Parcheggio Saba Matteotti, Parcheggio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주차장

 

아시시 추천 루트

아시시는 주요 명소가 여러 군데 산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관광 명소는 구도심 내에 있지만 산타 마리아 안젤라 성당과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구시가를 벗어난 지역에 있다. 따라서 구도심 내에서 모든 관광을 마칠 수 있는 다른 곳과 달리 이동이 많은 곳이다. 산타 마리아 안젤라 성당을 먼저 구경하고 구도심으로 이동하여 느긋하게 아시시를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 산타 마리아 안젤리 성당 주차장    차량 13분 → 파르케지오 사바 마테오티 주차장 → 도보 3분 → 산 루피노 성당 →  도보 8분 →  로카 마조레 →  도보 9분 →   코무네 광장 & 미네르바 신전 →  도보 1분 →  누오바 성당 →  도보 11분 →  성 프란체스코 성당 →  도보 13분 → 산타 키아라 성당 →  도보 3분 →  사바 마테오티 주차장

  • 우리는 산타 마리아 안젤리 성당을 보고 사바 마테오티 주차장에서 차를 세워놓고 걸어서 루피노성당, 코무네광자, 성프란체스코성당을 보고 코무네광장에 있는 Ristorante Taverna Dei Consoli di Tiradossi Maria Rosa라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최소 관광 시간

  • 주요 명소들은 세네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산타 마리아 엘리 안젤리 성당까지 본다 해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프란체스코 성인이 생을 마감한 이곳은 수도화를 처음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성당 안에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로 불리는 작은 예배당이 있는데 이곳이 수도회가 시작된 곳이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은 이 포르치운콜라를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지어진 성당이다.  아시시의 3대 기적이라고 불리는 기적 중 가시 없는 장미, 600년 동안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하얀 비둘기 한 쌍, 이렇게 두 가지 기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06:15-12:30, 14:30-19:30   무료   Piazza Porziuncola, 1, 06081 Santa Maria degli Angeli PG, 이탈리아    43.057773, 12.579687

오후 4시 반 쯤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라 성당

 

먼저 이 성당 주차장에 차를 무료로 주차하였다. 충분히 공간이 많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성당 옆의 Domus Pacis Assisi가 내가 예약한 호텔이었다는 것!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서 찍은 성당의 야경

 

 

산타 키아라 성당 Basillica di Santa Chiara

프란체스코 성인과 함께  존경받은 성녀 클라라를 위해 만들어진 성당이다. 그녀는 남성을 위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는 달리 여성을 위한 클라라 수녀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성당의 지하에는 클라라 성녀의 무덤과 함께 그녀가 입었던 수도복과 일상용품 등이 같이 보관되어 있다. 움브리아의 아름다운 평원을 조망할 수 있다.
■  06:30-12:00, 14:00-19:00  무료
■  Piazza Santa Chiara, 1,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68847, 12.617002

코무네 광장 Piazza del Comune

아시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광장이다. 고대 로마 제 국 시절에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이었던 포 로 로마노가 이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광장에는 시청 사, 여행정보 센터, 세 마리 사자 분수, 4톤 무게의 종이 있는 시민의 탑Torre Del Popolo, 2천 년 전에 만 들어진 미네르바 신전Tempio di Minerva이 있다. 미네 르바 신전은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성당으로 개조되었 다가 지금은 시립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가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져 아름답다. 주말에는 이 광장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  Piazza del Comune, 1,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  43.071119, 12.614896

 

 

산 루피노 성당 Cattedrale di San Rufino

아시시 첫 번 째 주교이자 마을의 수호성인인 루피노를 위해 만들어진 성당이다.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 당으로 5세기에 지어진 낡은 성당 위에 1228년 로마 네스크 양식으로 새롭게 지었다. 유리바닥을 통해 낡은 성당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성 프란체스코가 모든 상속권을 포기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 07:00-12:00, 14:30~19:00, 겨울~18:00  무료

 Piazza San Rufino, 3,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0371, 12.617740

 

 

누오바 성당 Chiesa Nuova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난 장소로, 지금은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지금도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성지다. 성당 곳곳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쉽 게볼 수 있다. 건물 앞쪽 마당에는 프란체스코 성인 부모 청동상을 볼 수 있다. 프란체스코를 못마땅하의 여겼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프란체스코를 위해게 늘 기도했다고 한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고뇌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대변하듯 어머니 청동상에만 쇠사슬 이 묶여 있다.
  08:00-12:30, 14:30~19:15   무료
  Piazza Chiesa Nuova 1,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0684, 12.615195

 

산 프란체스코 성당 Basilica di San Francesco

프란체스코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당이다. 성인이 된 직후 프란체스코를 모시기 위해 1228년부터 건축되었다. 성당이 세워지기 전에는 죄수들을 처형했던 장소였다. '지옥의 언덕'으로 불렸던 곳이지만 프란체스코 성당이 이곳에 지어진 후 '천국의 언덕'으로 불리고 있다. 2층으로 구성된 성당은 초기 이탈리아 고딕 양식 구조로 되어 있다. 1층은 치마부에의 프레스 교회, 2층은 조토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2층에 장식된 프란체스코 성인의 생애를 그린 28점의 프레스코화는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봉으로 뽑히기도 한다. 2000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성당을 찾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www.sanfransescoassisi.org     월~토 08:00-~19:30   무료
  Piazza Inferiore di S. Francesco, 2,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4988, 12.605397

자주 찍는 산 프란시스코 아시시 성당 앵글에 따라 찰칵!

 

로카 마조레 Rocca Maggiore

과거 통일왕국 시대가 아니었던 시절 주변 국가와의 많은 전쟁을 대비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채로 쓰였던 곳이다. 이탈리아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운 평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노을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0:00~해질 때까지  3€  Via della Rocca,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3226, 12.615320

아사시의 레스토랑

트라토리아 델리 움브리 Trattoria Degli Umbri 구글평점 4.5/5

코무네 광장에 위치한 전통 이탈리아 레스토랑, 파스타 요리가 맛있다. 크림 파스타 스트란고치 알라 노르치나Strangozzi alla Norcina를 권한다.

+39 075 812455 Piazza del Comune, 40,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943.071138, 12.615481

트라토리아 다 에르미니오 Trattoria da Erminio 구글평점 4.4/5

3대째 이어오는 미슐랭 가이드 추천 레스토랑이다. 어지간한 메뉴를 주문 해도 다 맛있을 정도로 이 지역 맛집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러 가지를 주 문하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면 세트 메뉴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39 075 812506 Via Montecavallo, 19/a,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1024, 12.618051

트라토리아 팔로타 Trattoria Pallotta 구글평점 4.3/5

지하에 자체 와인 셀러를 보유하고 있는 움브리아 전통 레스토랑이다. 여 행자들을 위한 투어리스트Tourist 메뉴를 가지고 있다. 티본 스테이크도 유명하다.

+39 0758155273 Vicolo Della volta Pinta, 3,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1077, 12.614497

아시시의 추천 숙소

눈 아시시 릴레 & 스파 뮤지엄 Nun Assisi Relais & Spa Museum ★★★★★ 구글평점 4.7/5

13세기에 만들어진 수녀원을 개조 해 만든 스파 전문 호텔이다. 아시 시 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숙소 다. 자체 보유하고 있는 레스토랑 에서 이 지역 최고급 재료를 활용 한 요리를 제공한다. 스파 요금은 객실에 포함되어 있다.

호텔 내 주차장 무료 1박기준: 250€ (일반 트윈룸) http://www.nunassisi.com

Via Eremo delle Carceri, 1A,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0536, 12.620131

지오토 호텔 & 스파 Giotto Hotel & Spa★★★★구글평점 4.3/5

객실에서 움브리아의 평원을 바라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호텔, 수영 장, 사우나, 마사지 숍 등 스파시 설을 갖추고 있다. 도시 초입에 위 치하고 있어 주요 관광지까지 도 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호텔 내 주차장 유료(1일 15€, 사전 예약 필수) 1박 기준: 100€ (일반 트윈룸) +39 075 812209

www.hotelgiottoassisi.it Via Fontebella, 41,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43.072561, 12.608523

그란드 호텔 아시시 Grand Hotel Assisi★★★★ 구글평점 4.2/5

1999년에 개장한 리조트 스타일의 호텔이다. 수영장과 스파 시 등을 갖추고 있으며 잘 정돈된설 정원이 인상적이다. 도심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언덕 위 에 있어 아시시 도시 전경을 감상 하기 좋다. 테라스도 갖추고 있다.

호텔 내 주차장 무료 1박 기준: 100€ (일반 트윈) +39 075 81501 ■ www.grandhotelassisi.eu
■ Via G. Renzi, 2, 06081 Assisi PG, 이탈리아 ■ 43.066186, 12.629747

 

호텔로 가는 길에 저녁 빛에 멀리 보이는 Assisi 구시가지 전경
이국적인 잡초도 저녁빛의 역광에 멋지다.
저녁빛을 받아 겨자색으로 빛나는 건물들
여기도 버섯같은 모양의 이탈리아 소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있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어슬렁거리며 거리로 나왔는데 마침 동네 축제가 열렸다.


 

Assisi 추가 정보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구릉 지대에 위치한 2만 8천명이 거주하는 도시이며,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과 1208년에 설립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본부가 위치한, 중세 역사에서 큰 중요성을 지닌 것을 인정받아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당과 수도원을 필두로 하여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로 늘 붐빈다.

아시시(이탈리아어: Assisi)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페루자도에 위치한 코무네다. 몬테 수바시오의 서쪽 저지대에 위치해있다.

1208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조직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그녀가 죽은 뒤 빈자 클라라 수녀회가 된 빈자 자매회를 조직한 아시시의 클라라(Chiara d'Offreducci)의 출생지이다. 13세기에 건립된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는 귀중한 유적이 많으며, 그 외에도 유명한 성당이 많다. 순례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이다.

1986년 이래로 세계 종교 지도자 서미트가 비(非)정기적으로 열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역사

기원전 1000년경에 이주민의 무리가 테베레 계곡 위쪽의 아드리아해까지 정착을 하였고, 또한 아시시의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움브리아인들이며, 고지에 요새화된 작은 정착지에 살았다. 기원전 450년부터 이 정착지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 결과로 인하여 이탈리아 중부의 지배권을 가져갔다. 그들은 몬테 수바시오의 단구에 풍요로운 뮤니시퓸인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였다. 아시시에서는 성벽, 포룸(오늘날에는 피아자 델 코무네, Piazza del Comune), 극장, 원형 경기장, 미네르바 신전(오늘날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바뀜) 같은 옛 로마 흔적들을 여전히 볼 수 있다. 또한 1997년에는 폼페이같은 드문 상태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가 잘 보존된 방이 있는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원후 238년, 아시시는 코스타노에서 순교한 루피노 주교에 의해서 기독교화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유해가 아시시에 있는 산 루피노 대성당에 안치되어있다고 한다.

동고트족의 왕 토틸라가 545년에 이곳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그 이후로 아시시는 롬바르드령의 일부로서 롬바르드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후에는 프랑크족 계열의 스폴레토 공국의 지배를 받았다.

11세기에 기벨린의 독립 코무네가 되면서 번영하는 코무네가 되었다. 끊임없이 구엘프 세력인 페루자와 갈등을 겪었고, 그 많은 싸움중에서도 폰테 산 조반니(Ponte San Giovanni)에서 열린 전투에서 프란체스코 디 베르나르도네(Francesco di Bernardone,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포로로 잡혔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거지로서 살게 되었고, 세상에 프란치스코회의 설립과 선언을 알렸다.

남아있는 로마 시대 성벽에 얽메이던 도시는 13세기에 성벽 밖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도시는 교황의 관할구역이였다. 도시에 있는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로카 마조레 요새는 1189년에 시민들에 의해서 약탈되었고, 1367년에 교황 특사인 힐 데 알보르노스의 명령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페루자의 지배를 받은 아시시는 몰락이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직업군인 비오르도 미켈로티,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그리고 그의 후임자인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소포르차 1세, 야코포 피치니노, 그리고 우르비노의 왕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2세 같은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는 1348년 흑사병의 창궐로 깊은 침체에 빠졌다.

도시는 교황 비오 2세(1458–1464) 시기에 다시 교황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569년에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바실리카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르네상스와 그 이후 몇세기 기간 동안은 평화로웠기에 계속해서 발전하였다.

오늘날에 순례지가 많은 아시시는 이곳 출생자인 성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프란체스코는 프란체스코회를 설립하였고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서 칭송받는다. 그는 "순수한 사랑"으로 많은 신자들, 심지어는 비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기억되고 있다(새 무리에게 한 그의 설교는 그의 삶에 있는 전설중 하나이다).

아시시는 1997년 9월 움브리아 지역에 발생한 엄청난 규모의 지진을 두 차례 겪었다. 눈에 뛸만큼 회복하였지만, 여전히 그때의 잔해들이 남아있다. 많은 역사적 지역에 강력한 피해가 야기되었지만, 산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같은 주요한 관광지는 2년 후에 다시 관람객 방문을 재개하였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

 

주요 볼거리

유네스코는 2000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회 건물들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성당

  •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 산 루피노 대성당
  • 산 키아라 성당
  • 산타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 성당
  • 코무네 광장 (Piazza del Comune)
  • 키에사 누오바
  • 산토 스타페노 성당
  • 에레모 델레 카르체리
  • 로카 마조레 (Rocca Maggiore)

 

옥좌에 앉은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와 네 천사(부분), 치마부에, 1280년, 프레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San Francesco d'Assisi)

  • 출생 : 1181년
  • 선종 : 1226년 10월 3일 (향년 45세)
  • 시성 : 1228년 7월 16일
  • 축일 : 10월 4일
  • 직업 : 수도자, 부제, 프란치스코회 창설자, 증거자
  • 종교 : 가톨릭
  • 상징 : 십자가, 비둘기, 성흔
  • 수호 : 동물, 자연환경, 상인, 이탈리아, 샌프란시스코, 필리핀 제도, 밀항자
  • 칭호 : 하느님의 음유시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이탈리아의 가톨릭 수도자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인물이다. 정확히는 수도원장쯤 되겠지만 스스로 그러한 명칭을 바라지 않았으며, 사제가 아닌 부제 신분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일반적으로 그의 신앙과 영성에 대한 존경심은 교파의 구분을 떠나 있다. 그는 그의 종파인 가톨릭 뿐만 아니라 성공회, 루터회, 독일 개신교[4]의 성인이며[5] 동시에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이다. 축일은 10월 4일이며 독일 개신교회의 경우 그가 선종한 10월 3일로 지키고 있다. 별칭은 하느님의 음유시인, 가난한 이들의 친구. 상징물은 비둘기, 오상(五傷),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십자가, 해골. 위 그림처럼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동물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한데, 다른 업적들로도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자연 친화주의적 사상은 그리스도교와 생태주의의 연관성, 공존 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손꼽힌다. 동물들, 특히 새 떼나 사슴 등과 함께 있는 성인이라면 100% 성 프란치스코. 권위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이었던 중세기 교황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와 비교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했을 때 더욱 화제가 되었다.

새에게도 설교했다는 일화가 꽤나 유명해서 위에 있는 그림과 같은 성화도 굉장히 많고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동명의 피아노 곡도 있다.

 

생애

 

회심하기까지

속명은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로, 이탈리아 중부 스폴레토 공국(Ducato di Spoleto) 움브리아주의 도시인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출장을 갔을 때 어머니 비카는 조반니[10]란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게 했는데, 아버지가 프랑스에 매료되어 돌아온 뒤, 프랑스인이라는 의미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이탈리아어로 Francesc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워낙 집이 부유하여 향락을 추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했던 10대 때의 프란치스코는, 기사를 꿈꾸며 전쟁에 참가했다 포로로 잡힌다. 그렇게 1년간 감옥에 갇혔고 풀려나온 뒤로는 큰 병을 앓는다.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지다 회복한 프란치스코는 이때부터 점점 친구들과 노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고, 이런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고, 한 여인이 그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다. 장비들은 너의 병사들을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다시금 기사가 되길 원하던 그는 1205년, 계속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풀리아로 가던 중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아시시로 돌아간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아시시의 동굴을 찾아가 묵상에 전념하곤 했다. 그러던 중 근방의 나환자촌에서 비참한 모습의 나환자를 본 프란치스코는, 피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즉각 그 나환자를 안아주고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발견하여 그 안에 들어갔다. 거기서 기도하던 도중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는 음성을 들은 그는, 무너져가는 '교회'가 가톨릭 교회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이 무너져가는 다미아노 성당인 줄 착각하고 그 길로 자기가 가진 돈과 아버지의 가게 물건을 일부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하였다. 다미아노 성당을 지키고 있던 늙은 신부는 그 돈을 거절했으나, 프란치스코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결국 성당 수리를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위해 아버지의 가게까지 탈탈 털어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틈만 나면 성당을 지을 벽돌을 구걸하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아버지는 격분했다. 아버지는 협박도 하고 얼러도 보고 아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아들의 상속권까지 빼앗으려 시의 승정원에 재판을 의뢰하는데,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돈주머니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군중 앞에 당당하게 고백한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광경을 지켜본 모두가 프란치스코를 미친 자로 보았지만, 하나둘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청년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아시시의 주교는 알몸이 된 프란치스코에게 농부의 망토를 걸쳐주고 십자가를 걸어주었다. 그는 다시 나환자들을 돕다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온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프란치스코는 마태오 복음 10장의 말씀[11]을 듣다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성소(聖召)[12]를 발견하고 그 복음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여행길엔 몸에 걸친 옷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는 신조였다.

 

수도자로서의 생활


이렇게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야산을 전전하던 프란치스코는 동료 11명과 함께 '작은 형제들'(프란치스칸 1회)을 조직한다. 작은 수도회칙까지 정한 이 조직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인가를 요청했고 마찰 끝에 인준을 받았다. 이때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할 때 꾸었던 꿈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즉 한 수도자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 즉, 교황의 성좌가 있는 바로 그 성당을 그의 어깨로 떠받치면서 무너지는 것을 겨우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 조직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에 있는[13] 허름한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성당에 본부를 두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14]

그 손길이 이슬람 세력에까지 미칠 무렵, 18세에 혼인을 앞둔 백작의 딸 글라라가 몰래 찾아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뜻을 밝히고 수도복을 입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는 남자 수도회였기 때문에 일단 근방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피신시킨 후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부모가 글라라를 데려가려 찾아오기도 하고, 15세가 된 여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 수도복을 입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따로 꾸리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한 부인회'이며 지금의 글라라회(프란치스칸 2회)이다.

그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선교 활동을 하러 모로코 등지로 가려 했지만 스페인을 떠나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 되돌아왔다. 그 뒤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마침 가톨릭과 이슬람 간의 격한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일루미나토 수사와 더불어 당당히 붙잡혀,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술탄 알 카밀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그리스도교가 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고, 술탄은 정말 그것이 실현된다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올 혼란이 염려되어 거절했다. 대신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이 든 술탄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 달라는 뜻에서 값나가는 선물들을 보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리고 나왔다.[15]

자신이 선교 활동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거두어들였던 형제들을 튀니지, 그리스, 프랑스, 모로코 등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로코에 파견된 5명의 작은형제회 수사(修士)들은 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순교자(franciscan protomartyrs[16])로 유명하다. 원래는 비탈레 수사가 이끄는 6명이 파견되었는데, 비탈레 수사가 아라곤에서 병이 나서 가지 못하게 되자 성 베라르도 신부가 나머지 4명, 즉 성 피에트로, 성 아주토, 성 아쿠르시오, 성 오토네를 이끌고 세비야로 가 모스크 근처에서 설교하다 잡혀 모로코로 끌려갔다. 아부 야곱이란 이름을 지닌 모로코의 왕 '미라몰린'은 그리스도교에 유화적[17]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석방시켜 그 지역의 가톨릭 신자인 '돔 페드로'의 집에서 살게 했다. 리더인 베라르도 신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랍어를 배워 근처에서 설교했다.

지나가다 이를 본 미라몰린은 돔 페드로를 시켜 5명을 아시시로 다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귀향하던 5명은 다시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돌아가 설교하다 또 붙잡힌다. 미라몰린은 이번엔 체우타로 쫓아보냈지만 다시 마라케시로 돌아왔다. 돔 페드로는 베라르도 신부 일행에게 마라케시에 사는 가톨릭 교우들한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고지식한 수사들은 그런 거 모른다. 결국 이슬람의 안식일에까지 거리로 나와 설교하던 베라르도 신부 일행은 그날따라 운도 나쁘게 미라몰린의 매의 눈에 포착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미라몰린은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심문한 뒤, 수사들의 맹랑한 대꾸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시미터를 뽑아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때가 1220년 1월 16일이고, 이날이 성 베라르도를 비롯한 수사 5명의 축일이다. 이들의 시신을 돔 페드로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로 운구했다. 그들의 장례 미사에 참례한 성 십자가 수도회의 수사 페르난도는 이때 자신도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페르난도가 가톨릭 성인 중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다.

또한 이들의 순교 7년 후인 1227년에는 성 다니엘이 이끄는 7명의 수사, 즉 성 사무엘레, 성 안젤로, 성 레오, 성 돔노, 성 니콜로, 성 우골리노가 모로코의 체우타로 갔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순교한다. 이들의 축일은 10월 10일. 어쨌든 결국 이슬람 지역 선교 활동은 2번이나 실패한 모로코 선교활동을 비롯하여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가 40세가 될 무렵, 작은형제회는 3천 명이 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 하자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존 회칙을 재정비했다. 약간 완화된 회칙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인가를 받아 쐐기를 박았다. 그는 수도회 장상직을 사임한 후, 다시 소수 동료들만 데리고 라베르나산으로 떠나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말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던 1224년 9월 14일 새벽,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산에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못박힌 케루빔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다.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며, 다른 성흔 체험자로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카푸친회 소속이었던 오상의 성 비오 신부 등이 있다.[18]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는 이때 이탈리아어로 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포르치운쿨라에 온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질 무렵,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동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걸친 옷을 모두 벗겨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요한이 전한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 141편을 읊은 뒤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죽음도 '자매'였다.

시편 141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
제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 사내들과 함께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저들의 진미를 즐기지 않으오리다.
의인이 자애로 저를 때려도 저를 벌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머릿기름, 제 머리가 마다하지 않으오리다. 저들의 악행을 거슬러 저는 늘 기도드립니다.
저들이 심판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제 말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 알리이다.
누가 밭을 갈아 땅을 파헤쳤을 때처럼 저들의 뼈가 저승 어귀에 흩어지리이다.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 제가 당신께 피신합니다. 제 영혼을 쏟아 버리지 마소서.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
제가 탈 없이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다음 날 성 조르조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 후, 1230년 5월 25일 그를 기념하여 지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0월 3일 저녁 오후 해진 뒤에 성 프란치스코가 숨을 거두었는데, 전례적 기준에 따르면 일몰 뒤라 다음 날로 간주되었으므로 10월 4일을 프란치스코 축일로 정하였다. 지금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전이예식(transitus)라고 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한다.[19] 전이예식이라는 이름은 성 프란치스코가 그날 지상에서 천국으로 전이(옮겨감)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9월 17일을 성 프란치스코 수난상처 축일, 혹은 오상 축일이라고 부르며,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산에서 성흔을 받았음을 기념한다.


기도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념일에 가톨릭 교회의 미사 때 바치는 본기도와 시간 전례 때 바치는 마침 기도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로마 미사 경본』 926면,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자책 링크. 전례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또한,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 생전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표지를 보거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그의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흠숭하나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20] <평화의 기도> 역시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쓰이며 그 내용과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종교를 떠나 자주 사용된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노래>는 성인이 눈병을 얻어 치료를 하면서 지은 것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구술한 것을 다른 형제 수사가 받아썼다고 전한다. 원제는 <피조물의 찬가(Laudes Creaturarum)>였는데 후에 성가로 작곡되면서 <태양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경애하는 형제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21]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자매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자매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자매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형제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자매이자 (또한)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자매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민순 사도 요한 신부 역

 

성인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는 물이나 불까지도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창조 아래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했다는 뜻. 병의 치료를 위해 불에 달군 인두를 몸에 지져야 할 때가 있었는데, 성인이 인두를 달구는 불을 향해 "내 사랑하는 불 자매여, 내가 언제 그대를 함부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의 사랑을 기억해서라도 나의 몸에 닿을 때 조금만 뜨겁지 않게 해 주오"라고 말했더니 성인의 몸에 닿았을 때 살이 타고 연기가 나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