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여행정보 (피렌체 Firenze)
피렌체(이탈리아어: Firenze, 영어: Florence 플로렌스, 문화어: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Regione Toscana 의 주도(州都)이자 피렌체 현(縣, Provincia)의 현청 소재지이며, 인구는 38만 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명이다. 토스카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città 이기도 하다. 피렌체는 아르노 Arno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 la culla del Rinascimento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메디치 Medici 가문이 다스렸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 capitale del Regno d'Italia 였다. 매년 수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I. 역사
피렌체는 로마의 도시로 기원을 하였으며, 번영한 무역업과 중세시대 코무네 comune 금융업의 중심지로서 긴 세월을 보낸 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람이 되었으며,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핵심 도시 중 하나였다.
14세기 이 곳에서 통하던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다. 이탈리아 문학 황금기의 대부분의 모든 작가들과 시인들은 다른 지역의 방언들을 제치고 피렌체 방언을 문학 언어로서 채택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냄으로써 현재 이탈리아어의 체계는 피렌체와 관련이 있다.
중세 시대를 시작으로, 피렌체의 자본(황금 플로린 Florin d'or)은 영국에서 브뤼허, 리옹, 헝가리에 이르는 유럽 전역의 경제 발전에 자금을 댔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 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대기도 하였고, 마찬가지로 아비뇽 수도 건설과 로마로 귀환 후, 로마의 재건과 사업 등 교황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귀족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 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정치적 문화적 마스터 마인드로 뽑힌다. 메디치 가문은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해내기도 했는데, 이들은 16세기 초의 교황 레오 10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이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혼인하였으며, 1559년에 그가 사망한 후, 프랑스의 섭정으로서 군림했다. 메디치 가문은 1569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토스카나 대공으로 군림했으며,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다.
로마 기원기
에트루리아인 Etrusca 들은 기원전 200년 피에솔레 Fiesole에 소규모의 정착지를 세웠으나, 로마의 평민파를 지원한 보복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가 기원전 80년에 파괴시켰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기원전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Iulius Caesar 가 그의 퇴역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로서 건설하였고 본래는 플루엔티아(Fluentia)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이곳이 두 강 사이에 지어져 나중에 플로렌티아(Florentia, 흐름)라 바뀌게 되었다. 이곳은 현재의 레푸블리카 광장 Piazza della Repubblica 이 교차되는 카르도, 데쿠마누스로 된 주요 거리에 있는 군영 형식으로 지어졌다. 로마와 북방 사이에 있는 주요 길인 카시아 가도 Via Cassia 에 위치해 있었고, 아르노 Arno강의 비옥한 계곡에 위치한 이 정착지는 빠르게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어갔다.
몇 세기가 지나, 플루렌티아는 동고트인들의 지배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고, 이 기간에 동고트인들과 비잔티움 사이에 전쟁 문제를 자주 맞이했으며, 이는 대략 1,000명의 인구 감소를 야기했다. 평화는 6세기 랑고바르드족 통치 시에 비로소 돌아왔다. 피렌체는 774년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고 루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인구는 다시 성장하고 상업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1000년대 이후
우고 Ugo 토스카나 변경백 marchese di Toscana 은 서기 1000년에 피렌체를 그의 거주지로 택한 무렵에 피렌체 미술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1013년에 산 미니아토 교회 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 건설이 시작되었고, 산 조반니 세례당의 외부는 1059년과 1128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이 기간은 또한 피렌체의 옛 강력한 경쟁 상대인 피사가 쇠퇴한 시기(제노바에게 패배하고 1406년에 피렌체의 지배하에 놓임)이기도 하며, 자노 델라 벨라 Giano della Bella 가 이끈 반귀족주의 운동에 따른 전문 상업계가 선도한 힘의 성장이 이뤄져, 그 결과로 오르디나멘티 디 주스티치아 Ordinamenti di Giustizia(정의의 법령들) 가 세워졌다.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피렌체 공화국은 피렌체 시민들이 미망인 토스카나의 마틸데의 죽음 이후 토스카나 변경백 marchese di Toscana 에게 대항하여 1115년에 건립되었다. 피렌체인들은 마틸데가 사라진 도시에 코뮌을 형성하였고, 공화국은 시뇨리아 Signoria 라고 알려진 의회가 통치하였다.
공화국의 역사는 쿠데타와 다양한 가문들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와 반쿠데타 등으로 기복이 심한 역사를 지녔다. 1434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 가 그를 과거에 추방시켰던 가문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메디치 가문이 정부를 손에 넣었고 1494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하였다. 조반니 데 메디치(이후 교황 레오 10세)가 1512년에 공화국을 재정복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이 코냐크 동맹 전쟁 기간인 1527년에 두 번째로 상실되었으나 11개월의 공성전 끝에 1531년에 통치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공화국 정부는 1532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 공화국의 공작’으로 임명함에 따라 세습군주제가 도입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2. 배경
메디치 가문의 부흥
1348년 흑사병 이전 인구는 94,000명으로 추측되며, 그 중 25,000명이 피렌체의 양털 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345년에 피렌체는 양털 노동자들에 의한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데, 1378년에는 치옴피의 난에서 과두 정치를 상대로 잠깐의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들을 진압시킨 후,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격렬한 경쟁 상대인 알비치 가문의 영향하(1382–1434)에 놓였다.
15세기에 피렌체는 부와 경제적 성공을 거뒀다고 여겨진 유럽의 도시 중 가장 거대하였다. 거주민들의 삶이 모두가 목가적인 것이 아니듯이, 그들 사이에 큰 부의 차이가 있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전의 피렌체에서 도시의 중요한 통제권을 가져온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인물이다. 도시가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녔지만, 그의 권력은 젠테 누오바(gente nuova, 새로운 사람들)라는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동맹이 구축해논 거대한 후원망에서 나왔다. 메디치 가문원은 교황에게 그들의 통치력에 기여를 한 은행가이기도 했다.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곧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에게 1469년에 넘어갔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등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위대한 예술 후원가였다. 로렌초는 음악가로서도 재주가 많았고 알렉산더르 아흐리콜라, 요한네스 기셀린, 하인리히 이자크 같은 작곡가와 가수들을 피렌체로 불러들였다. 동시대 피렌체인들은, 그를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 위대한 로렌초)로 기억하고 있다.
1492년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한 후, 그의 자리는 아들인 피에로 2세가 이어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을 때, 피에로 2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저항하기로 택했다. 피사의 성문 앞에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를 깨닫자, 프랑스 국왕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피렌체 폭동을 일어나게 하였고 그들은 피에로 2세를 1494년에 몰아내버렸으며, 메디치 가문의 첫 통치는 공화정 정부의 복원과 함께 막을 내렸다.
사보나롤라와 마키아벨리
이시기에 도미니코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0년 산 마르코 수도원의 프라이어가 되었다. 그는 그가 본 부도덕성이 널리 퍼지고 물질적 부유에 대한 집착을 꾸짖는 회개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추방을 그들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통해 더욱 민주적인 통치를 이끌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사보나롤라가 공개적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를 고발하자, 그는 연설이 금지되었다. 그가 이 금지 사항을 어기자, 그는 파문되었다. 그의 극도의 가르침에 지친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려 체포하였다. 그는 이단으로 유죄를 판결받아, 1498년 5월 23일 화형당하였다.
두 번째로 흔치 않은 독특한 통찰력을 지녔던 이는 자주 정치적 편의주의의 합법과 심지어 위법행위를 통해서라도 강력한 군주권하에서 피렌체의 재건을 처방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 다시 말해서, 마키아벨리는 통치와 권력 행사를 다룬 그의 정치 안내서 군주론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상가다. 메디치 가문의 의뢰를 받아, 마키아벨리는 또한 도시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 역사서도 집필했다. 피렌체인들은 메디치 가문을 두 번째로 몰아내고 1527년 5월 16일 공화국을 재건국한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지원을 받아, 1537년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세습 공작이 되었으며, 1569년에는 두 세기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었다. 토스카나 전역에서 루카 공화국(시간이 흘러 공국)과 피옴비노 후국만이 피렌체에서 독립 상태로 남았다.
18세기와 19세기
메디치 가문의 단절과 1737년에 로렌 공작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즉위는 토스카나를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 왕령지에 포함하게 하였다. 이는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분가 가문이 되었고, 1801년 부르봉파르마 가에게, 1807년 12월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병합하면서 폐위된다. 피렌체는 1808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4년까지 프랑스 아르노 데파르망의 행정 구역이였다.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은 빈 회의를 통해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회복하지만, 1859년 마침내 폐위되었다. 토스카나는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수도 기능을 대신하였으며, 도시를 현대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피아자 델 메르카토 베키오(Piazza del Mercato Vecchio)에 있는 옛 상가들과 많은 중세 주택들을 허물고 신식 주택과 전체적인 계획 거리로 대체하였다. 피아자(광장, 처음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이 붙었으나, 현재는 레푸블리카 광장[공화국]이라고 불림)는 눈에 띄게 넓어졌고 거대한 개선문이 서쪽에 세워졌다.
이탈리아의 두 번째 수도인 피렌체는 6년 뒤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의 철수로 이탈리아 왕국에 추가될 가능성이 생기며 로마로 대체되었다.
20세기
인구가 두 배가 증가한 19세기가 지난후에 관광업, 상업, 금융업,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결과로 피렌체의 인구는 20세기에 들어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 피렌체는 오랜 기간 독일군의 점령기(1943–1944)를 겪었고 무방비 도시로 선언되었다. 토스카나에서 활동하다 독일군에 사망한 연합군 병사들은 도시 외곽에 있는 묘지들에 묻혀있다(미군은 도시 남쪽에서 9km 거리, 영국군과 영연방군들은 아르노 오른쪽 제방 중심부의 동쪽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1944년 퇴각하던 독일군은 영국군이 건너는 것을 어렵게 하기 위해 올트라노(Oltrarno) 지구와 도시의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던 아르노강에 있던 다리들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하를레 슈타인하우슬린(Charle Steinhauslin)이라는 독일군 장군이 베키오 다리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부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베키오 다리 남쪽을 따라 바로 있던 바사리 회랑 같은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지뢰밭으로 사용되어 파괴되었다. 그 이후 아르노강을 연결하던 다리들은 가능한 남아있는 재료들을 최대로 이용해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였지만, 베키오 다리 주변 건물들은 현대와 옛 스타일을 혼합한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1966년 11월 아르노 홍수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많은 예술품에 피해를 입었다. 도시 벽들에 있는 조그만한 플래카드들은 홍수 당시에 물이 얼마까지 차 올랐는지를 나타낸다.
지리
피렌체는 카레지, 피에솔레, 세티냐노, 아르체트리, 포조임페리알레, 벨로스구아르도 (피렌체) 언덕이 형성한 분지에 있다. 아르노강과 세 개의 다른 강들이 이곳을 거쳐 흐른다.
기후
피렌체는 온난 습윤 기후 (Cfa)를 지녔으며, 약간의 지중해성 기후 (Csa)도 있다. 평균 또는 적은 강우를 지닌 여름과 시원하고 축축한 겨울이 특징이다. 피렌체는 항풍이 없어, 여름 기온은 해안가보다 높다. 여름 시기에 강우는 대류우인 반면에 겨울에는 기복있는 강우 형태를 띈다. 강설은 거의 매년 이루어지고 있지만, 땅에 쌓이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최고 기온은 1983년 6월 26일에 42.6와 최저 기온은 1985년 1월 12일의 -23.2이다.
문화
미술
피렌체는 1500년경에서 1527년까지 지속된 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탄생지였다. 르네상스 미술은 자연주의와 인간의 감정에 많은 중점을 두었다. 중세 미술은 보통 정형적이고 상징적이었다. 현존하는 중세 미술품들은 대부분이 종교 관련한 것들이며, 작품들의 주제는 성직자들이 고른 것들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르네상스 미술은 한층 이성적이고, 수학적이며, 개인에 대한 것이 되었으며,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작품에 서명을 집어 넣기 시작한 라파엘로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주도하였다. 종교는 여전히 중요했으나, 새로운 시대가 들어서며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에케 호모 (보스)', '의자의 성모' 같이 미술에서 종교적 인물들의 인간화가 이루어졌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인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예술에 반영되었다.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세계의 옛 거장들을 연구하면서, 르네상스는 미술과 사회적 측면에서 고전적 가치의 재탄생이 이루어졌다. 미술은 이상주의에 반대되는 현실주의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이탈리아 회화의 아버지들인 치마부에와 조토는 피렌체에서 거주했고 마찬가지로 건축과 조각 분야의 혁신자 아르놀포와 안드레아 피사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의 시조들인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마사초, 그리고 기베르티, 델라 로비아스, 필리포 리피, 안젤리코 등도, 보티첼리, 파올로 우첼로, 그리고 만능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역시도 피렌체에 살았다.
이들의 작품은 다른 여러 시대의 예술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우피치 미술관, '황금기'의 회화를 소장한 팔라티나 미술관,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들을 소장한 바르젤로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소장한 산 마르코 박물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들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을 소장한 부오나로티 가문의 저택, 바르디니, 호르네, 스티버트, 로마노, 코르시니, 피렌체 현대 미술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은기 박물관, 보석 박물관 등 피렌체의 미술관 및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자이크로 유명한 피렌체 세례당, 조각들로 유명한 피렌체 대성당, 프레스코화가 있는 중세 교회들 및 베키오 궁전, 피티 궁전,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다반차티 궁전 등 사설과 공설 궁전들, 수도원, 회랑, 리펙터리, '케르토사' 등 피렌체에는 일부 기념물들도 위치해 있다. 피렌체 고고학 박물관에는 에트루리아 문명에 관한 기록물들이 존재한다. 피렌체는 미술품들로 가득하여 일부 첫 피렌체 방문자들은 피렌체에 미술품들을 보고 스탕달 증후군을 겪는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1377년-1466년)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1404년-1472년) 등의 피렌체 건축가들은 르네상스 건축과 신고전주의 건축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얹어져 있는 피렌체 대성당은 피렌체의 스카이라인의 특징이다. 피렌체인들은 13세기 말에 돔이 없이 건축물을 짓기로 결정했었다. 14세기에 브루넬레스키가 제시한 설계안은 당시 기준으로 가장 큰 돔 설계도였고, 로마의 판테온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등 로마 시대의 두 거대한 돔 건물 이래로 유럽에 지어진 첫 대형 돔이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돔은 벽돌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큰 돔으로 남아 있다. 두오모의 앞에는 중세 세례당이 위치해 있다. 두 건축물은 자신들이 지닌 장식성을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으로 통합시켜냈다. 최근 들어, 주변의 조토의 종탑을 포함해 두 건축물에 있는 예술품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모작들로 대체되었다. 그림 원본은 현재 대성당의 바로 동쪽에 있는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피렌체에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산 로렌초, 산타 마리아 노벨라, 산타 트리니타,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산타 크로체, 산토 스피리토, 안눈치아타, 오니산티, 그외 여러 곳에 미술품들로 채워진 교회 다수가 존재한다.
피렌체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와 치마부에부터 시작하여 to 조토, 난니 디 반코, 파올로 우첼로에 이르며, 로렌초 기베르티를 거쳐 도나텔로, 마사초, 델라 로비아 가문 등이 있었고, 프라 안젤리코, 보티첼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을 거쳐서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른다. 그 외에는 벤베누토 첼리니, 안드레아 델 사르토, 베노초 고촐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필리포 리피,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 오르카냐, 폴라이우올로, 필리피노 리피, 베로키오, 브론치노,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 미켈로초, 로셀리 가문, 상갈로 가문, 폰토르모 등이 있었다.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다른 지역 출신 예술가들로는 라파엘로, 안드레아 피사노, 잠볼로냐, 일 소도마,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있다.
피렌체의 화랑에는 우피치와 피티궁이 있다. 조각품에 대해 대형 컬렉션을 갖춘 곳에는 바르젤로 미술관과 두오모 박물관이 있다. 이 시설들은 도나텔로, 베로키오,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 미켈란젤로 등등으로 채워져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는 1501년과 1504년 사이에 제작되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가장 잘 알려진 예술품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 장식을 위해 제작한 미완의 노예 조각상들이 있다. 그 외의 주요 볼거리에는 중세 피렌체의 시청사인 시뇨리아 궁전 (베키오 궁전으로도 알려짐), 고고학 박물관, 과학사 박물관, 다반차티 궁전, 스티버트 박물관, 산 마르코, 메디치 예배당, 산타 크로체 박물관,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클로이스터 박물관, 동물학 박물관 ('라 스페콜라'), 바르디니 미술관, 호르네 미술관 등이 있다. 현대 조각가인 마리노 마리니가 제작한 작품들의 컬렉션이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에 소장 중이기도 하다. 스토리치 궁전은 특별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이다.
'이탈리아 관광 > 중부지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27(목)] 이탈리아 15일째 - 오르비에토(Orvieto) (0) | 2024.06.22 |
---|---|
[06.26(수)] 이탈리아 14일째 - 치비타 디 바뇨레죠(Civita di Bagnoregio) (0) | 2024.06.22 |
[06.26(수)] 이탈리아 14일째 - 오르떼(Orte) (0) | 2024.06.22 |
[06.17(월)] 이탈리아 5일째 - 피렌체(Firenze) (1) | 2024.06.17 |
[06.16(일)] 이탈리아 4일째 - 아시시(Assisi) (4) | 2024.06.16 |